오늘은 오랜만에 일본인 지인을 만나는 날이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로 나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일본에 갔던 게 벌써 3~4년 정도 지났으니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처음에 일본 여행을 간다고 SNS에 글을 쓰니까 갑자기 라인으로 연락해서 대뜸 만나자고 하는데, 거절을 못하는 타입이라 "아, 그럼 하루 정도는 비워 둘게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산책을 가자길래 한 시간 정도 걸으면서 이것저것 둘러 보나 했는데, 몇 시간 짜리 코스를 서너 개 들고 와서는 이중에 뭐가 나을 것 같냐고 해서 많이 당황했다. 일본 여행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괜히 말했나 싶으면서도 후회를 계속 했는데, 여행을 좀 다니면서 점점 컨텐츠 부족에 시달리게 되니 차라리 하루 정도는 이렇게 맡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칸다 역에서 만납시다"
칸다 역 서쪽 출구에서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했다. 산책 코스는 무려 칸다에서 오다이바까지. 지도만 보면 대체 이걸 어떻게 가나 싶을 정도--농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곳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였는데, 도중에 2km 정도 하는 거리를 다리를 건너서 간다고 했다.
코스 자체는 걸어서 두 시간 정도라고 했지만 최단 거리가 두 시간일 뿐, 이곳저곳 들리다 보면 한 시간 두 시간 씩 늘어나는 건 금방이라 생각했다. 코스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들린 곳은 고쿄(皇居). こうきょ라고 쓰므로 발음할 때에는 코-쿄라고 한다. 말할 때 계속 코-쿄인지 코쿄-인지 헷갈렸던 기억이 난다. 이곳은 한자 그대로 천황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외곽은 상시 오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고쿄는 매우 넓어서 외곽만 돌아 보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상시 오픈인 고쿄 히가시 교엔의 모습. 상당히 넓어서 그런지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적혀 있지만 특별하게 경찰들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순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엔 입구의 도로는 탁 트이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날은 날씨도 맑아서 러닝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물어 보니 교엔 주변이 러닝하는 사람들에게 정석 코스로 인기라고. 11시지만 그래도 오전부터 러닝이라니...심지어 날씨가 맑긴 했어도 상당히 더웠는데, 역시 운동하는 사람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 싶었다.
교엔은 도쿄역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나와 걷다 보면 도쿄역을 볼 수 있다. 도쿄역에 대해서는 다음 날 만날 다른 일본인 지인과 얘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때의 소재로 아껴 두려 한다.
그렇게 자연스레 마루노우치 나카도오리로 향했다. 걷다 보면 도시 숲의 느낌이 나서 좋았다. 도시라고 해서 너무 빌딩으로만 둘러 싸인 풍경이 아닌, 적당히 낮은 건물들 사이의 거리를 걷다 보면 나오는 그것만의 좋은 분위기가 있다.
사진은 마루노우치를 걷다가 발견한 하나은행 동경지점. 하나은행이 이런 곳에도 있었다니.
마루노우치를 빠져나왔을 때 즈음 히비야 공원에 도착하였다. 히비야 공원도 꽤나 넓어서 제대로 둘러 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공원에서 본 것 중에 가장 기묘하게 생겼던 펠리컨 분수 한 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미 고쿄에서 히가시 교엔이라는 꽤 넓은 장소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던 우리는 히비야 공원을 그렇게 오랜 시간 둘러보지는 않기로 하고 적당히 빠져 나왔다.
이곳은 조죠지(増上寺). ぞうじょうじ이므로 조-죠-지이다. 이곳도 고쿄마냥 처음에 발음이 헷갈렸다. "죠죠지?"하니까 "아니, 조죠지"라고 정정받았다.
조죠지를 사진으로 남기고 보니까 정말 도쿄스러운 풍경이 남았다. 고쿄도 그렇고, 일본은 도심 속을 걷다가도 일본의 전통 건축물이 있는 곳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조죠지의 사진에는 조죠지를 뒤로 도쿄 타워와 정말 도시스러운 빌딩이 같이 찍히게 되었다. 이게 도쿄구나, 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장이 되었다.
생선으로 육수를 낸 라멘
나는 처음에 각종 생선만 적혀 있고 꽁치랑 멸치가 추천이라고 하길래 뭔가 생선이 나오는 일식 백반집(?) 같은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라멘 집이라고 했다. 가게에는 라멘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고 숯불구이 농후 중화 소바(炭火焼濃厚中華そば)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한두 시간 걸은 걸로도 충분히 지쳐서 배가 고팠기에 정식을 시켰는데, 라멘의 양 자체가 많아서 그냥 라멘 단품만 시켜도 괜찮았지 싶었다. 라멘의 맛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라멘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지만 생선으로 육수를 낸 것이 또다른 맛있는 지점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라멘 국물에서도 간 생선이 건더기로 있어 맛에 재미를 더해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식사를 할 때 한 가지 고집하던 것이 있는데, 바로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멘치카츠만 3일동안 먹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은 허용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종류로 먹을 것. 라멘은 이번 여행에서 세 번째인데, 단연 1등으로 꼽을만 한 맛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상기했듯이 라멘 자체의 양도 많았고, 정식이라고 하더라도 밥 한 공기에 반찬이라고 하기도 뭣한 엄청 작은 오이 장아찌같은 게 하나 추가되어 나오는 수준이라 그냥 라멘 단품을 시키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것. 육수에 간 생선이 들어가 있어 라멘 국물을 마실 때도 평소와는 다른 경험이었는데, 밥을 한 공기 먹고 나니 라멘 국물까지 다 들이키기에는 위장이 허락하지 못했던 것도 정식을 시키지 말았을 걸 하고 생각하게 된 요인 중 하나이다.
걸어서 다리를 건너다
지금까지의 여정은 도쿄 츄오구에서 미나토구로 걸어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정말로 츄오(중심)에서 미나토(항구)로 왔기 때문이다. 목적지인 오다이바로 가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가로질러야 한다. 위에서 말했던, 물리적으로 갈 수 없어 보이는 코스라고 생각됐던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바다를 가로지르기 위해 레인보우 브릿지라는 곳으로 향했다.
레인보우 브릿지는 2km이 안되는 길이의 다리로, 다리의 양쪽 가장자리를 걸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잠실대교를 건널 때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단 내가 과연 2km의 다리를 건너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먼저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같이 간 일행은 자신이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넜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면서 하는 말이, 너스레를 떨며 예전에 올라갔을 때에는 바닷바람이 너무 심해서 여고생 둘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내 괜한 걱정을 배가시키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다.
이미 다리만 건너면 오다이바에 도착하는 곳까지 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이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바람은 좀 불었지만 비명을 지를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철조망이 아주 잘 돼 있어서 딱히 바다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넌다고 해서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리를 좀 걷다 보니 한 구간은 높은 철조망이 없이 나름 경관이 트여 있길래 레인보우 브릿지 위에서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막상 걷다 보니 다리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나름 좋았어서 금방 다 건너게 됐다. 신기했던 건 이 다리 위에서도 러닝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다이바에 오면 반드시 찍어야 하는 1:1 사이즈 건담이다. 오면서도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막상 산책이 끝나고 사진첩을 둘러 보니 오다이바에서 찍은 사진이 이 건담 하나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오다이바는 '목적지'였을 뿐 오다이바에서 딱히 뭔가를 둘러 보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다이바에 도착하고 다이버시티만 살짝 돌고 건담을 보고,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전해 주고 헤어져서 숙소로 돌아갔다.
분명 산책 코스로는 두 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섯 시간은 족히 걷고 있었다. 분명 이후의 일정이 있다고 밑밥을 깔아 뒀는데...일본에 가기 전에는 괜히 말했나 싶으면서도 여행 오고 나서 역시 하루쯤은 만나는 것도 좋지 생각하다가, 결국 돌면서 다섯 시간을 점심 시간 빼고는 논스톱으로 걸어 버리니 역시 괜히 말한 건가 싶고...
다음 날에도 일본인 지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번엔 확실하게 이후 일정을 어필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다.
마무리
원래 여행을 오면 걸음 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야 했는데 이날은 5시간 동안 미친 듯이 산책을 한 탓에 지쳐 버려서 이후에 쭉 호텔에서 뻗어 버렸다. 저녁에 뭘 먹었는지 사진이 없는 이유도 이날 그냥 뻗어 버려서 편의점에서 대충 때웠기 때문이다.
5일차 결산
실패한 일정: 오차노미즈 악기 상점 둘러 보기(원인: 산책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길어져 지쳐버림)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쿄+α 여행 7일차 (2023. 05. 05.) (0) | 2023.05.27 |
---|---|
도쿄+α 여행 6일차 (2023. 05. 12.) (0) | 2023.05.15 |
도쿄+α 여행 4일차 (2023. 05. 02.) (1) | 2023.05.09 |
도쿄+α 여행 3일차 (2023. 05. 01.) (2) | 2023.05.08 |
도쿄+α 여행 2일차 (2023. 04. 30.) (0) | 2023.05.06 |